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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24) 김운삼 요셉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9-07 15:45:21 | 조회 : 332

가톨릭평화신문 2017. 09. 10발행 [1431호]



[평양의 순교자들] (24) 김운삼(요셉)


짧은 생애에도 뜨겁게 신앙 증거한 두 소년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 중 나이 어린 10대 순교자는 그리 많지 않다. 손에 꼽을 정도다. 103위 중에는 14세에 순교한 유대철(베드로) 성인 등 4위, 124위 중에는 12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이봉금(아나스타시아) 복자가 있을 뿐이다. 근ㆍ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가운데는 평양교구 출신으로 각각 17세, 16세에 순교한 송은철(파트리치오)과 김운삼(요셉)이 10대 순교자로 시복이 추진되고 있다. 신학교에 갈 기회만 기다리던 송은철, 복사로 있으면서 신학교에 입학하고자 노력했던 김운삼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함께 피랍돼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혔고 그 뒤로는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김운삼은 복사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복사 순교자인 셈이다.
 

그는 1934년 6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일병리(현 평남 온천군 온천읍), 일명 ‘해돋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준성과 어머니 정소희(체칠리아)는 6남매를 뒀으나, 어려서 다 죽고 김운삼만 살아남아 외아들로 컸다. 3세 때 진남포로 이주했고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가 당뇨병을 앓다가 사망하자 평북 박천군에 살았던 할머니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뒤 어머니가 평양으로 데려와 함께 살면서 성모보통학교로 전학했고, 성모학교 5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속이 깊고 말수가 적었으며 순하고 느긋한 성품이었다. 학교생활도 원만했고, 늘 웃는 얼굴로 친구들을 대했다. 미신에 빠져있던 어머니에게 교리 문답서를 구해다 주고 교리공부를 하도록 권했다가 핀잔을 듣곤 했다.
 

학교 공부를 마치고 귀가할 때도 먼저 성당에 들러 성체조배를 한 뒤 귀가했다. 김운삼의 친구였던 곽성현(요한 사도, 아명 곽영수)씨도 “운삼을 비롯한 또래 소년들은 늘 함께 어울려 성당에서 기도하고 놀고 공부하면서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이 주례하시는 미사 전례를 돕는 복사 생활이 큰 즐거움이었다”고 「북녘땅의 순교자들」을 통해 회고한다.
 

홍 주교와 최항준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김운삼은 다른 복사들처럼 신학교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성모학교 졸업 뒤 동평양 선교리(현 평양시 선교구역 선교1동) 무순공업학교에 진학하고서도 덕원신학교에 가고 싶어 했으나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갈 전해주려 길 떠나다 피랍

1949년 5월 14일 김운삼은 김필현 신부의 심부름으로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수녀원으로 향한다. 그에 앞서 5월 9일에서 10일 사이 공산 당국이 함흥대목구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와 성직자들을 체포하고 수도원을 몰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홍 주교가 항의서한을 보냈고, 내무상 박일우가 홍 주교를 만나자고 한 전갈을 전하러 가던 길이었다. 뒤이어 따라갔던 송은철과 먼저 수녀원에 있던 홍 주교 등은 다 함께 평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일행은 모두 가루게(감흥리)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피랍됐다. 김원우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해 12월께 같은 감방에 있던 현수라는 아이가 문틈으로 시체 치우는 것을 보다가 소맷부리에 단추 하나가 달린 교복 차림을 한 김운삼의 시체를 누군가 끌고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설사 당시에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1950년 10월 20일 평양수복 당시 평양 인민 교화소 수감자들이 대부분 총살됐기에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그의 어머니는 월남 뒤 세례를 받았고, 신학생들을 도왔다. 그 뒤 아들을 찾는다며 쓰지 않고 모아뒀던 재산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정릉 본원 성당 신축에 봉헌하고 1984년 7월 24일 선종했다.



김운삼은 
 

▪1934년 6월 29일 평안남도 용강군 해운면 일병리 태생

▪성모보통학교 졸업

▪동평양 선교리 무순공업학교 재학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주교, 송은철 등과 함께 피랍돼 행방불명


오세택 기자 sebasiano@cpbc.co.kr

자료=평양교구 사무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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