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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6)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3-30 12:12:38 | 조회 : 3639

가톨릭평화신문 2017. 04. 02발행 [1408호]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6)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서다


시대를 앞서 신자 눈높이 사목 펼쳐



최양업 신부가 산골 우물가 무궁화 나무 아래서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가사 중 ‘사향가’를 가르치는 모습을 인형작가 임수희씨가 인형으로 표현한 작품. 출처=가톨릭 굿뉴스




최양업 신부는 민족의 주체성뿐 아니라 문화적 주체성을 뚜렷하게 지닌 사목자였다. 그는 스승이며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의 현실과 풍속을 익힌 후 보내라고 요청했다. 또 공자ㆍ맹자가 조선인이 아니며 사대부 양반들의 글인 한문도 우리나라 글이 아닌 외국어라고 했다. 조선 문화와 중국 문화를 구별하여 중국도 외국이고 유교도 외국 사상이라고 했으며, 조선의 종교 문화에는 불교ㆍ유교ㆍ도교ㆍ무속이 혼재하고 있다고 했다. 또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학문적 탐구 없이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비난을 일삼는 지식층의 폐쇄성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어떤 사상이나 종교가 민족과 사회의 발전에 유익하다면 동서양을 구분하지 말고 개방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교회가 올바른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하고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1857년 9월 15일 불무골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최양업 신부는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보급에 앞장 섰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 천주가사 중 공심판가를 옮긴 필사본. 가톨릭평화신문 DB


▲ 최양업 신부는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겼다. 사진은 「천주성교공과」절두산순교성지 소장본.


▲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 등 4가지 근본 교리를 154조목으로 나눠 문답식으로 설명한 「성교요리문답」. 한문본인 이 교리서를 최양업 신부가 우리말로 옮겼다.




천주가사 통해 신앙과 신자의 삶의 방식 가르쳐

최양업 신부는 이런 맥락에서 우리 민족을 일깨워 계몽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 한글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 당시 교회 내에선 1839년 순교한 이문우(요한)와 민극가(스테파노)가 지은 천주가사가 널리 보급돼 있었다. 천주가사는 가톨릭 교리를 우리말 가사체 운율에 실은 시가로 누구나 쉽게 암송하고 이해했다. 지금까지 최 신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는 사향가(思鄕歌)ㆍ선종가(善終歌)ㆍ사심판가(私審判歌)ㆍ공심판가(公審判歌) 등 4편이 있다. 최 신부는 천주가사를 통해 가톨릭 신앙과 신자로서의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최 신부가 쓴 네 편의 천주가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 어떤 권력과 인간관계도 하느님 공경에 앞설 수 없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지당하지만 하느님을 저버리면서까지 효와 충을 유지할 수 없다. 진정한 효와 충은 하느님 안에서 드러난다. 하느님께 대한 효와 충의 실천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을 이루는 애주애인(愛主愛人)의 실천이다.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순명과 배은망덕을 근거로 이뤄지므로 죄를 통회하고 보속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짓게 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천주교가 지속적인 박해로 점차 민중 종교 운동으로서 성격을 띠게 됐다. 둘째, 여 교우와 하층민 출신 신자들이 증가했다. 셋째, 교리교육의 대상과 실상이 바뀌었다.



한문 모르는 중하층민 신자 늘어

자료에 따르면 1784~1891년 여교우의 비율은 전체의 26%에 불과했던 것이 1846년에는 36%로 늘었다. 반면, 양반과 중인 출신 신자가 47%에서 26%로 줄었다. 지속적인 박해로 지식층이 줄고 한문을 모르는 중하층민이 늘어났다. 이에 한역 서학서 등 글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습득하던 것이 외워서 입으로 전하는 암송구통(暗誦口通)으로 교리교육 방식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됐다.

“사실 사본문답(四本問答, 세례ㆍ고해ㆍ견진ㆍ성체성사) 전체를 완벽하게 익혀서 세례 준비를 마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해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한글의 유용성, 전교에 활용


교우촌을 사목하면서 한글이 교리교육에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 최 신부는 신자들이 교리를 쉽게 배우고 이해하는 데 한글을 적극 활용했다. 최 신부는 또한 1859년 여름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 교리서인 한문본 「성교요리문답」과 한문본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은 1934년에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공식 교리서로 쓰였다.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는 1972년 「가톨릭 기도서」가 출간되기까지 110년간 사용됐다.

“한글이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나라 알파벳은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신부는 일찍부터 한글을 이용한 교리서와 신심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며 “바로 이것이 천주가사의 저작과 유포에 중요한 배경이 됐다”고 강조했다. 신학자들은 최 신부의 한글 교리서와 기도서 편찬과 천주가사 저술 활동 자체를 ‘토착화 작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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